교회안내
  • 간추린 교회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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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제일교회 명칭변경과 교회위치 이동사항

  • 1800년

    1897.3.5

    만복동에 목포교회 설립

  •  

    1898.10

    유진벨(베유지)선교사 사랑채로 목포교회 예배처소 옮김

  • 1900년

    1900.10.1

    양동 126번지 한식 기와집 17칸 신축, 양동교회 또는 목포교회라 부름

  •  

    1902.4.1

    양동교회당을 17칸 증축, 로티위더스픈기념교회당으로 부름

  •  

    1910.3.5

    양동 127번지 866평 대지 위에 건평 121평 신축 기공

  •  

    1911

    겨울 신축 성전 완공

  •  

    1953.8.16

    총회 분열로 양동교회당은 기장측이 자리 잡고, 예장측은 정명여자중학교 강당을 임시예배처소로 사용함

  •  

    1961.2.13

    호남동 6번지 450평 대지 구입

  •  

    1961.3.5

    교회명칭을 양동제일교회로 변경

  •  

    1961.6.19

    성전신축기공( 현재 양동제일교회어린이집)

  •  

    1962.5.10

    신축성전 헌당예배(현재 양동제일교회어린이집)

  •  

    1976.9.16

    제18대 당회장 윤여권목사 담임목사로 부임

  •  

    1982.10.19

    양동제일교회 본성전 기공예배

  •  

    1992.11.29

    양동제일교회 본성전 헌당예배

  •  

    1993.4.10

    양동제일교회 경로대학 1기 입학식

  •  

    1997.3.5

    교회설립 100주년 기념예배 및 행사

  •  

    1997.4.7

    양동제일교회 어린이집 개원

  • 2000년

    2000.9.17

    100주년 창립기념교회 기공예배(현 도림교회(무안)

  •  

    2001.3.25

    100주년 창립기념교회 도림교회 헌당예배

  •  

    2003.1.12

    종합관 성전기공예배

  •  

    2003.12.14

    종합관 입당 감사예배

  •  

    2005.12.18

    윤여권원로목사님 추대

  •  

    2005.12.18

    19대 당회장 곽군용목사 위임목사로 부임

  •  

    2006.1.8

    1회 사랑의연탄나누기 발대식

  •  

    2006.2.18

    1회 연경원양육반 개강

  •  

    2008.12.7

    문찬주. 최유미선교사가정 파송예배(남아프리카공화국)

  • 2010년

    2011.3.13

    임인모. 강미화선교사가정 파송예식(남아프리카공화국)

조선(한국)에 개신교가 들어오기까지

  • 한국에 개신교가 들어오게 된 것은 1832년 네덜란드 선교회의 소속 구츨라프(Karl. F. A. Gutzlaff)선교사가 중국대륙을 통해 조선에 들어와 서해안의 장산곶, 백령도, 대청도를 거쳐 안면도에 가까운 금강입구에까지 성경을 배포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충청남도 고대도(古代島)에 머물면서 국왕(순조32년, 1832년)에게 통상을 희망한다는 글과 함께 서양포, 천리경, 시진표(時辰表) 등과 아울러 성경 한 질과 구츨라프 자신이 한문으로 쓴 복음서 두 권을 진상품으로 전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통상거절을 통보 받고 되돌아가고 만다.

    그 후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던 토마스(R. J. Thomas)선교사가 1865년(고종 2년) 9월 황해도 웅진에 도착하였다. 그는 2개월여 머물면서 백령도와 도서지방에 한문성경을 나눠주면서 복음을 전하다가 되돌아간 후 1866년 중국에서 미국 상선인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에까지 접근하지만, 관군에 의해 상선은 불에 타고 토마스선교사는 참수형을 당하게 된다. 이것이 한국 개신교회의 첫 순교 사건이며, 그가 배포한 성경과 그의 순교의 피는 개신교회의 밑거름이 되었다.

    한국 선교에 관심을 갖고 있던 중국 주재 스코틀랜드 연합장로회 선교사인 로스(J. Ross) 선교사와 메킨타이어(J. Maclntyre) 선교사는 1876년 3월 강화도조약으로 한국문호가 개방되자 한국어 교사를 얻고자 두 번째 방문한 고려문(당시 청국과 조선의 국경이자, 합법적인 통상지역인 만주 통화현의 작은 마을)에서 의주상인 이응찬을 만나게 된다.

    로스선교사를 통해 최초의 개신교 신자가 된 이응찬은 고향 의주를 왕래하면서 백홍준, 이성하, 이익세, 김진기 등을 개종시켰으며, 로스와 메킨타이어 선교사를 도와 1879년부터 한글로 된 성경 번역을 시작하여 1886년 신약전서의 번역을 완료하여 1882년 최초의 한글성경인 ‘예수셩교 누가복음 젼셔’가 출간되게 되었다. 누가복음부터 출간되기 시작한 단편 한글성경은 1887년 최초의 한글 신약전서인 ‘예수셩교젼셔’가 묶어져 나오기 시작하였다(참고로 구약성서는 1910년4월2일 완역되어, 1911년 개정된 신약성서와 함께 ‘성경젼셔’로 합본 간행되었다).

    훗날 1885년 인천으로 입국한 미국 북장로회 언더우드 선교사는 이미 한글성경이 나와 있다는 것을 알고는 깜짝 놀랐다고 한다.

조선(한국)에 입국한 선교사들

  • 한국 개신교회의 선교사로 첫 발걸음을 옮긴 사람은 일본 주재 미국 감리회(북감리회) 선교사인 메클레이(R. S. Mclay)다. 메클레이는 일본에서 김옥균을 만나게 되었고, 그를 통해 고종황제에게 선교의 뜻을 전달하게 되었다. 이렇게 선교의 문이 열리게 된 후 미국 북장로회 알렌(H. N. Allen) 의료선교사가 1884년 9월 한국에 도착하였다. 장로교회의 첫 선교사인 것이다. 그가 내한한 지 얼마 안 되어 일어난 갑신정변으로 인해 보수파의 민영익이 칼에 맞고, 알렌선교사의 진료로 생명을 유지하게 되자 고종과 민비를 비롯한 궁정의 총애를 받게 되었고, 마침내 왕실 주치의가 되었다.

    이 일 이후 선교사의 위상이 높아지자 한국 선교를 위해 준비하고 있던 미국 북장로회 소속 언더우드 선교사와 미국 감리회(북감리회) 소속 아펜젤러 부부 선교사가 1885년 4월 15일 부활절에 인천항에 도착하게 된다. 이어서 5월 3일에는 미국 감리회 소속 스크랜턴 선교사가 그의 모친과 함께 입국하였다. 한국에 도착한 언더우드 선교사는 알렌이 운영하는 제중원에서 물리와 화학을 가르치면서 알렌을 도왔으며, 전도하였다.

조선(한국)에 입국한 선교사들

  • 언더우드 선교사는 안식년을 맞아 귀국하여 1891년 9월 시카고 멕코믹신학교의 초청을 받아 ‘한국 선교 현황’ 보고회를 갖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남장로교 신학생 테이트(L. B. Tate,)가 큰 은혜를 받게 된다. 다시 언더우드는 네슈빌(감리교회의 본부와 세계 다락방 출판사가 위치)에서 ‘한국 선교 현황’에 대해 강연을 하게 되었다. 이 때 당시 벤더빌트 대학에 유학 와 있던 윤치호도 이 강연에 초청을 받아 한국의 역사와 정치상황에 대해서 강연을 하고 있었다.

    이 강연회에서 테이트는 물론 리치먼드 유니온신학교에 재학하고 있던 레이놀즈(W. D. Reynolds, 이눌서 선교사, 목포교회 제2대 당회장)와 존슨(C. Johnson)도 큰 은혜를 받고 중국선교사 지원에서 변경하여 테이트와 마음을 같이하여 한국에 선교사로 나갈 것을 결심하게 되었고, 미국 남장로회 해외 선교부에 한국선교를 지원하게 되지만 미지의 나라라는 이유와 재정적 지원이라는 문제로 미국 남장로회의 반대 의사를 통보 받게 된다.

    그들은 다시 언더우드를 초청하여 미국 남장로회 선교 구역을 순회하며 한국 선교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왜 우리가 한국 선교를 원하는가”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하는 등 하루 3시간씩 열심히 기도하였다. 결국 그들은 선교를 떠날 준비하라는 미국 남장로회의 통보를 듣게 된다. 이렇게 되기까지 언더우드의 역할을 컸던 것은 물론이다. 그래서 프레스턴(J. F. Preston, 변요한 선교사, 목포교회 제4대 당회장) 선교사는 언더우드 선교사를 가리켜 ‘호남 교의 아버지’라 불렀던 것이다.

    언더우드 선교사와 그의 친구들, 형 존 언더우드 장로의 재정적인 후원에 힘입어 미국 남장로회는 7인의 선교사(테이트와 그의 여동생 메티 테이트, 레이놀즈 부부, 전킨 부부, 데이비스)를 파송하게 된다. 결국 이들은 1892년 인천을 거쳐 11월 7일 서울에 도착하며, 그들은 1893년 1월 28일 미국 북장로회 의료선교사인 빈턴(C. C. Vinton)의 집에 모여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는 장로교 선교사들이 모여 ‘장로회 미션공의회’를 조직한다. 이 모임에서 한국에서의 분할선교지역을 성립하게 되었고,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들은 호남지역(제주도 포함)과 충남 일부(서천, 보령, 홍성, 부여, 장항, 임천, 대천, 한산)를 선교지역으로 삼게 되었다.

    한편 미국 남장로회 선교부에서는 제2진으로 드루(A. D. Drew, 유대모 선교사) 의료선교사 부부를, 제3진으로 벨(E. Bell, 배유지 선교사, 목포교회 제1 , 3대 당회장) 선교사 부부를 한국에 파송하였다.

목포교회 시작(제1~3대 당회장)과 선교사의 활동

  • 목포에 선교사(이눌서 선교사, 유대모 의료선교사)가 처음 방문한 것은 1894년 4월 18일이다. 당시 의료선교사가 없던 상황에서 유대모 의료선교사를 파송 받은 한국 내 선교사들은 전라도 선교여행 중 방문한 것이었다.

    미국 남장로회 선교회에서는 나주 지역을 택하게 되었지만, 나주 주민들의 강한 반발로 포기하고 선교회는 배유지 선교사의 조사(조선인-변창연)를 목포에 거주토록 하고, 처소를 구입하도록 하였다. 이것이 1897년 목포교회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변창연 조사를 통해 주택을 구입하였던 배유지 선교사(목포교회 제1대 당회장)는 항구가 보이는 곳에 건물을 짓기로 마음먹고 1898년 6월 10일 건축을 시작하여 8월 16일 완성하였다. 11월 오웬(C. C. Owen, 오기원, 오원) 의료선교사가 합류하여 목포에 선교의 불꽃을 당기게 되었다.

    1901년 배유지 선교사의 부인(로티 여 선교사)이 선교도중 심장마비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자 배유지 선교사는 일시 귀국한다. 오원 의료선교사도 격무에 시달려 건강이 악화되어 휴가를 얻어 일시 귀국한다. 결국 목포 선교부에는 스트레퍼 여선교사만 남게 되지만, 선교회에서는 그녀마저 철수시킨다. 목포 선교가 잠시 중단되기도 한 때이었다. 6개월여 지난 후 안식년을 마치고 돌아온 이눌서 선교사(목포교회 제2대 당회장)가 목포 선교부와 목포교회를 임시로 이끌게 되었다. 그 후 배유지(목포교회 제3대 당회장 임직) ? 오원 선교사가 1902년 재입국하고 임시로 머물러 있던 이눌서 선교사는 성경번역위원회 일로 다시 서울로 돌아가게 되고, 목포 선교는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1903년 6월 28일에는 2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석조건물이 완공되었고, 목포교회 교인들은 교회 이름을 로티 여 선교사의 귀중한 순교의 정성을 기념하기 위해서 ‘로티 위더스픈 기념교회당’이라 불렀다.

    배유지 선교사는 목포뿐 아니라 나주, 광산, 장성, 영광, 함평, 순창 등지에서 교회를 설립하였다. 그는 1904년 목포지방의 선교구역을 프레스톤(J. F. Preston, 변요한, 목포교회 제4대 당회장) 선교사에게 맡기고 광주를 중심으로 교회를 설립하기 시작하였고, 광주에 머물면서 광주 숭일, 수피아여학교를 설립하였고 목포 및 광주 그리고 전남지방 선교의 큰 업적을 남기고 1925년 노환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목포교회(제4~5대 당회장)와 남녀 미션학교

  • 선교사들은 이미 전주에는 전주신흥학교와 기전여학교를 설립해서 청소년 교육에 열중하고 있었으며, 군산에는 영명학교와 멜본딘여학교가 설립되었다. 1898년 목포에 상설 선교부가 개설된 이후 청소년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던 스트래퍼(F. E. Straeffer, 서부인) 여선교사는 이듬해인 1899년 목포에 도착하였다.

    스트래퍼 여선교사는 1902년 남녀 학생들을 모아 가르치기 시작하였으며, 1903년 남녀 학교를 따로 분립하게 되었다. 영흥학교와 정명여학교의 시작이었다.

    배유지 선교사는 선교사 월례회의 결의에 따라 오원 선교사와 함께 광주로 이거했으며, 그 후임으로 프레스턴(J. F. Preston, 변요한 선교사, 목포교회 제4대 당회장) 선교사가 목포교회에 부임하면서 영흥학교 교장으로도 활동하게 되었다. 목포영흥학교는 목포 선교부의 절대적인 지원하에 출발하긴 하였지만 목포교회 교인들도 학교 운영비의 절반을 부담하였다.

    목포에서 성공적으로 사역한 프레스턴(변요한) 선교사 부부는 광주에서 오원 선교사가 소천하자 그 후임으로 광주로 옮겨 갔다. 그리고 군산지방에서 사역했던 해리슨(W. B. Harrison, 하위렴 선교사, 목포교회 제5대 당회장) 선교사가 목포교회 당회장 겸 목포 선교부의 책임자로 부임하였다.

목포교회의 자립과 한국인 목사의 위임

  • 1901년 마펫(Samuel A. Moffett, 마포삼열) 선교사가 한국 교회는 한국인 목사가 이끌어야 한다면서 평양에 신학교를 세우게 된다.

    1904년 조선예수교장로회 공의회에서 각 지역에서 목회자가 될 만한 일꾼이 있으면 추천해 달라고 해 각 도 위원회에서 추천한 19명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도록 허락했다. 이 때 전라공의회 위원회에서는 김필수(테이트 선교사 조사 겸 어학교사, 최초 전주서문교회 초대 장로), 윤식명, 최중진(테이트 선교사 조사, 전주교회 최초 장로), 김창국 등을 천거하였다.

    평양신학교는 1907년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여 9월 17일 평양장대현교회에서 열린 조선장로교회 공의회에서 서경조, 한석진, 송인서, 양전백, 방기창, 길선주, 이기풍 등 7명을 목사 안수한다. 드디어 역사적인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초대회장-마포삼열 선교사, 서기-한석진목사)가 창설된 것이다. 1909년 9월 3일 평양신학교에서 제3회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가 개회되었고, 1909년 9월 6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윤식명 외 7명이 목사 안수 장립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특별히 호남지방으로서는 최초로 3인 목사가 탄생한 것이다.

    해리슨(하위렴, 목포교회 제5대 당회장) 선교사 부부가 목포에 도착하였지만 오랜 지병으로 고생하고 있었던 중 호남의 첫 목사인 윤식명(尹植明)이 목포교회로 부임하여 동사목회를 하게 되었다. 선교 보고에 따르면 목포교회는 주일 아침에는 550명 참석하였으며, 교회가 비좁아 남자 교인은 예배당에서 예배 드렸고, 여자 교인들은 영흥학교 건물에서 모여 예배드렸으며, 교회학교 아동부는 13개 반(350명)으로 나누어 주중에 운영되기도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목포교회는 선교사들과 윤식명목사의 왕성한 활동으로 교인들은 순수 교인들의 힘으로 교회당을 건축할 것을 결의하였다. 선교 보고에 따르면 1910년 3월 신자 3백여 인이 양동 127번지(현, 기장 양동교회)에 석조건평 121평과 대지 864평을 7,100여원의 건축비로 익년에 준공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미국 남장로회 선교협의회에서는 목포교회가 자립하자 1909년 윤식명 목사에게 목포교회를 맡기고(목포교회 제6대 당회장, 1909~1914) 선교사들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켰다.

양동교회 교인들과 3.1 운동

  • 목포지방의 3.1 운동은 3월 21일 양동교회 교인을 중심으로 해서 일어났으며, 특별히 1915년 양동교회 장로 장립을 받았던 곽우영을 위시해서 같은 교회 서기견과 서화일이 모두 만세운동의 중심인물이었다. 교회는 구역 조직을 통해서 운동을 확산시켜 갔으며, 양동교회 이경필 목사(제8대 당회장)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더욱이 거사를 앞두고 양동교회 교인들은 서기견 집사의 가정에 모여 하나님께 밤새도록 기도하였다.

    서기견과 강석봉은 영흥학교와 정명여학교 학생 동원 책임을 맡았다. 정명여학교 학생이었던 이은득은 독립선언서를 만들기 위해 촌색시 차림으로 변장하고 광주에 나가서 등사기를 구해 오기도 하였다.

    만반의 준비를 다한 양동교회 교인들과 정명여학교, 영흥학교, 보통학교, 목포상업학교 학생들은 거사일인 3월 21일 남교동 시장에 모여 만세를 부르도록 하였다. 시위 도중 일본 경찰과 헌병들은 총칼을 휘둘렀으며, 이 와중에 대형 태극기를 휘두르며 선도하던 양동교회 서기견 집사는 칼에 팔을 다치기도 하였다. 부상자들이 속출하고 무려 200여 명의 학생, 시민, 교인들에 체포되었다. 일경은 나이 어린 학생 100여 명은 돌려보내고 나머지 100여 명은 구속시켰다. 양동교회 이경필 목사를 비롯해서 서기견, 서화일 등 많은 교인들이 목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양동교회는 이경필 목사가 수감되어 있는 동안 생활비(엽전 여덟냥)를 그에게 드렸지만, 목사는 절반은 자녀들 위해서 사용하고 절반은 서기견과 서화일 집사 가정에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일제 신사참배와 교단 그리고 학교

  • 일제는 한반도를 서서히 병참기지화 시켜 가면서,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키면서 대륙침략에 힘을 쏟기 시작하였으며, 이 때 내선일체를 부르짖으며 한국교회로 하여금 이 일에 적극 협력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일은 미션학교로부터 시작되었고, 미션학교는 신사참배를 우상 숭배로 알았기에 단호히 거절하게 된다. 미션학교들이 거세게 반발하자 학교의 책임자인 교장을 해임시키는가 하면 외국인 선교사들에게 추방령을 내리는 등 강력하게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조선 총독부의 각 학교에 내린 신사참배 명령에 대해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부에서는 1935년 11월에 모인 월례회에서 신사참배를 하는 것보다 학교를 폐교하는 것이 낫겠다고 결의한다.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이 일어나면서 조선 총독부는 9월 6일을 애국일로 정하고 이 날을 기해서 전국 학교로 하여금 신사참배를 실시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에 신사참배에 불참한 미국 남장로회 선교부에서 운영하는 광주숭일학교, 수피아여학교, 목포영흥학교, 정명여학교 등 네 학교가 당국으로부터 폐교 조치를 당하였고 전주신흥학교, 기전여학교, 군산영명학교, 멜본딘여학교, 순천남녀매산학교는 폐교 청원을 당국에 제출하고 문을 닫게 되었다.

    호남지방에 있는 10개교가 폐교된 뒤, 1938년 평양에서 모인 총회 제27회에서는 신사참배결의를 하게 된다. 이에 놀란 미국 남장로회 선교부에서는 다른 선교부와 같이 한국 교회와는 단절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선교사들의 임시당회장 권한을 스스로 사임하기로 하였고 각 노회에서는 선교사가 맡고 있던 당회장권을 한국인 목사에게 맡기고 노회 내의 모든 조직도 한국인 목사가 맡기로 하였다.

    선교사들이 맡고 있었던 각종 병원시설 또한 문을 닫게 되었고, 선교사들은 철수하게 되었다. 1940년 11월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철수하였으나 선교회 재단 책임자인 타마자 선교사의 가족과 도대선 선교사(Miss M. Doson)와 유화례(Miss F. Root) 선교사는 가족과 함께 병원을 지켰다. 그러나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제는 타마자 선교사는 스파이란 혐의로 체포되어 4개월 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결국 이들도 1942년 철수하게 되었다.

박연세 목사와 순교

  • 박연세는 1883년 전라북도 김제군 용진면 신사리에서 대대로 농토를 일구어 가면서 살던 박자형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느 날 그의 부친은 군산 선교부에서 활동하는 전위렴 선교사를 만나 복음을 듣게 되었고, 그의 가족 전부가 개종하게 되었다.

    박연세는 당시 전위렴 선교사가 자신의 사랑채에서 시작한 군산영명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그 후 고등과에 진학하고 김제군 백구면 유강리에 있는 신명학당에 한문과 역사를 담당하는 교사로 취직하게 된다. 그는 이곳에서 김해 김씨 문중의 김신애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된다. 그리고 부인 김신애의 처외조부 김준의 사상을 접하게 된다. 김준은 의병을 모집하여 의병대장으로서 일본군과 싸운 경력을 가진 의병 운동가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민족자결주의 사상이 퍼져 가고 있을 때,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약제과에 근무하던 이갑성은 젊은 의학도들을 자신의 방에 불러 모아 지방망을 구축하는데 군산영명학교 출신인 김병수가 전라북도 군산지방과 이리지방의 연락책임을 맡게 된다. 김병수는 곧바로 군산에 내려와 자신의 은사인 박연세를 만나 3 ? 1 운동 거사 준비를 했다. 비밀리에 거사를 준비하는 중 일제 경찰의 습격을 받아 군산지방의 3 ? 1 운동 책임자였던 박연세, 이두열, 김수영, 송정헌 교사 등이 체포되었다. 그러나 각 학교 학생들과 시민들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박연세는 2년 6개월의 형을 언도 받고 수감되었다.

    박연세 장로는 2년 6개월의 형기를 마치고 다시 고향 구암교회에 돌아와 전북노회의 추천을 받고 평양신학교에 진학한다. 3년간의 과정을 마친 후 1925년 졸업한 그는 1925년 1월 20일 이리교회에서 모인 제16회 전북노회에서 이수현 목사와 함께 강도사 인허를 받았다. 이리고현리교회와 황등동련리교회는 박연세 목사를 위임목사로 청빙하게 된다.

    당시 양동교회에서는 이경필 목사가 시무하고 있었는데, 제주 선교사로 가게 되었을 때 양동교회는 그의 후임으로 박연세 목사를 청빙하게 된다. 그리하여 1926년 9월 26일 박연세 목사는 목포의 양동교회로 자리를 옮기게 된 것이다.

    신사참배 문제로 노회들이 시끄러운 때인 1938년, 이미 4월에 제주노회와 순천노회가 각각 신사참배를 결의하였으며 이보다 훨씬 앞서서 2월에는 평북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총회의 헌의하였다. 당시 전남노회장이었던 박연세 목사도 신사참배가 종교가 아니고 국가의식임을 강조하는 분위기 속에 그만 순응하고 만다. 그러나 후일 이 거짓에 속았음을 안 박연세 목사는 확연하게 일본의 황민화정책에 정면 도전하고 나섰다.

    일제는 천황을 신으로 만들고 일본의 모든 백성들은 천황의 신하라는 의미로 황국신민의식을 불어넣기 시작하였다. 천황이란 말은 중국 도교에서 유래된 것이며 우주 지배자를 천황대제라고 불렀다. 일제는 7세기 초에 중국 수나라에 사신을 보낼 때에 수나라의 황제와 대등한 말로서 도교의 천황대제란 말에서 두 자를 따서 천황이란 말을 사용하게 되었으며, 그 이전에는 대왕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일본 천황이 사망하게 되면 다음 천황이 탄생하면서 신으로 그 자리를 잡아 가는 것이 그들의 제도이다. 일본인들은 천황을 신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천황을 위해서 죽는 것을 가장 영광스럽게 여기고 있으며, 천황을 위해서 죽은 일본 백성들은 모두 야스쿠니신사에 그 위패가 안치되기 때문에 가장 영광스럽게 여기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42년 7월 7일 일제는 중일전쟁 5주년을 기념하는 주일로 전국 교회로 하여금 이 날을 지키게 하였다. 이 행사는 천황을 찬양하고 중국 대륙에서 천황을 위해서 싸우고 있는 천황군을 위해 예배드리기 위한 주일 행사였다. 그러나 박연세 목사는 천황을 위한 설교가 아닌 약육강식(弱肉强食)이란 제목으로 대동아전쟁에 대하여 비판적인 설교를 하게 된다.

    박연세 목사 재판 결과문에 보면 그는 일제의 강압적인 압력에 의해 신사참배는 국민적 의식이라고 하여 속아 넘어 갔지만 일제가 몇 년 사이에 행해 온 일들을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대동아전쟁 그 자체를 합리화하고 총력을 기울이기 위해서 신사참배를 종교로 까지 끌고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주일 아침 예배시간에 대동아전쟁을 비방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민족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한글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였으나, 박연세 목사는 일본어를 잘하는 실력을 지녔음에도 일본말을 사용하지 않고 한국어와 한글만 사용하였다. 이로 인해 교회 내 친일세력들은 영적인 지도자가 일본말을 하지 못하기에 자격이 없고 일본 국민의 자격이 없다고 하여 일본법으로 처벌해 달라고 송전승과 김천재현 등이 고소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42년 8월 30일 주일 아침예배시 설교에서는 “육으로는 천황폐하를 제일로 존경할 수 있어도 영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제일 존경의 대상이다”고 말함으로써 천황제에 대한 정식 도전을 선포하게 되었다.

    결국 박연세 목사는 1942년 11월 일경에게 체포되어 목포경찰서에 수감되게 되었다.

    목회자를 빼앗긴 상황에서 일제는 한국장로교회에 신사참배하도록 강요한 후 다시 내선일체라는 미명하에 한국에 있는 모든 교회들을 일본기독교에 예속시키고 각 지역에 있는 교회들을 강제로 통폐합시켜 합동교회를 운영하도록 하였다. 이 일로 목포 시내에 있는 중앙교회, 연동교회, 죽교리교회, 온금동교회 등은 양동교회로 모두 통폐합되었으며 목포일본인교회만 남게 되었다. 당시 연동교회에서 시무했던 이남규 목사는 같은 교회 장로인 김규언, 최강순, 김창옥과 함께 신사참배 및 통폐합반대운동을 전개하다가 감옥에 투옥된 일도 있었다. 그 후 출옥한 이남규 목사는 교회에서 추방을 당하여 낙향하였다. 김창옥 장로는 심한 고문 후유증으로 출오 후 얼마 후에 세상을 떠났다.

    박연세 목사가 1942년 11월 수감된 후 목포형무소로 이감되어 미결수로 있다가 1943년 10월 목포지방법원에서 1년형을 언도 받고 다시 항소하게 됨으로 대구고등법원(복심법원)으로 이감되면서 대구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였다. 그는 징역 1년형을 확정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44년 2월 15일 추운 독방에서 두 손을 모으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으로 순교하고 말았다. 이는 서남동 목사의 증언이다.

    당시 양동교회 학생회 출신으로 박연세 목사의 영향을 입어 대구남문교회의 목사가 된 서남동 목사는 박연세 목사가 옥고를 치르고 있는 동안 면회 가기도 하면서 양동교회 교인들에게 박연세 목사의 소식을 전하곤 하였는데, 박연세 목사의 부고를 들었을 때 서남동 목사는 양동교회측에 전보를 보냈다. 그러나 목포우체국장은 서남동 목사가 보낸 전보를 목포경찰서장과 짜고 고의적으로 한 달 후에서야 전달해 준 것이다.

    대구형무소 공동묘지 가매장터에서 시신을 찾아 목포까지 오게 되었을 때, 목포경찰서는 비상이 걸려 양동교회 조승제 목사(제 11대 당회장)에게 단단히 부탁하여 장례식만은 양동교회에서 하지 못하도록 지시하였고, 조승제 목사는 이에 순응하여 장례식을 방해하기도 하였다.

    이에 이남규 목사와 서남동 목사는 가족과 의논하여 야간에 장례식을 거행하기로 하고 몇 명 안 되는 양동교회 교인들이 함께 자리를 같이 하여 19년 동안 민족 교회를 키워 왔던 박연세 목사를 산정동 뒷산에 자리 잡고 있는 공동묘지에 모셨다.

    박연세 목사를 비롯해서 각 지역에서 수많은 목회자와 성도들이 천황신에 도전하고 반일적인 행동을 했다 해서 갖은 고통과 핍박을 받았지만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들어 응답해 주셔서 일제는 결국 망하고 말았다.

    이렇듯 양동제일교회는 목포에서 복음의 씨앗을 뿌린 수많은 선교사와 순교의 피, 목회자와 성도들의 기도의 열매를 맺어가며 성장하고 있음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다. 할렐루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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